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소라 히바리 (문단 편집) == 여담 == *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엔카 가수이다. 다만 '''미조라''' 히바리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틀린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가 맞다. || [youtube(XEYUSiOizkA)] || ||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 * [[도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 따르면,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 시절 일본인 작곡가 코가 마사오(古賀正男)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https://youtu.be/7HMnmfhGUY0|수록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단, 미소라 히바리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는데, 이 곡에서도 [[부산항]]이란 단어는 [[일본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이라고 불렀고, 후렴부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한국어로 부른 적이 있다. 이것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본 가수들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도 대부분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분은 한국어 그대로 불렀다. 단 이 곡을 일본에서 제일 먼저 리메이크한 것은 1979년 '도노사마 킹스'의 <泪の波止場(눈물의 부둣가)>다.[* 가사내용은 원곡과 거의 같으나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있다.] 1983년에 '아츠미 지로'가 발표한 <釜山港へ帰れ>에 처음으로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수록되어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은 아츠미 지로 버전의 커버곡이다. * [[교토]] 아라시야마에 미소라 히바리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미소라 히바리관'''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 * [[TBS 테레비]] 방송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미소라 히바리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 <미소라 히바리 탄생이야기(美空ひばり誕生物語)>가 제작되었다. 그녀의 역은 일본의 유명 가수이자 배우인 [[우에토 아야]]가 맡았다. * [[마츠우라 아야]]의 <초원의 사람(草原の人)>는 생전에 미소라 히바리가 작사한 가사에 음을 덧붙여 만들어진 곡이다. * [[한국]]을 대표하던 작곡가 [[박춘석]]이 작곡한 <바람 주점(風酒場)>을 미소라가 불러 1978년에 발매한 적이 있었다. * 생전에 가수 [[패티김]]의 팬으로 잘 알려졌으며 패티김은 미소라 히바리 3주기 추모 공연에 단독가수로는 유일하게 공식 초청되었다. * 마지막 곡이자, 명곡으로 추앙받는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는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아름다운 가사[* 이 점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비슷하다. 시나트라 옹도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50대였다. 다만 시나트라 옹은 이후로도 30년 이상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와 더불어 마침 이 노래가 히바리의 마지막 곡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온 곡으로 이 곡의 싱글 앨범은 1989년 1월 11일에 출시되었다.] 일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전설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히바리는 이 노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더욱 큰 여운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기성가수들은 물론 발라드, 성악 등으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젊은 가수들까지 자주 방송에서 부르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작사는 그 유명한 [[아키모토 야스시]]. * [youtube(OCiwZC5cbW4)] 15살 때의 모습. 영화 <悲しき小鳩> 에서의 한 장면이다. 부르는 노래는 <東京キッド>이다. 그녀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로, [[김연자]]가 리메이크하여 취입하기도 했다. * 1957년 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도중 동갑내기 여성 극성팬에게 [[염산]]테러를 당했으나, 다행히 얼굴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범행을 저지른 여성 팬은 이전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집에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었으며, 공연 대기실에도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 [[Stan|범행 이유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미소라 히바리가 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 정도의 치료 후 1월 29일 다시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 1962년 영화배우 코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이혼했다. 다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미혼이다. 아키라는 히바리가 연예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길 원했지만, 히바리는 연예활동에 미련이 많았기 때문에 불화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히바리의 어머니나 매니저 등 주변 사람들도 부부관계에 개입을 많이 했고, 아키라가 마음대로 빚을 지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 [[기자회견]]에서 아키라는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대었으나, 이혼을 원하는 히바리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 출산 경험은 없다. 다만 남동생 카토 테츠야의 아들인 카토 카즈야(加藤和也)를 입양했다. 히바리의 사후, 양자인 카즈야[* 다키마쿠라의 창시자 챵코 마스다가 출연한 [[https://www.youtube.com/watch?v=vlSIaMiOVIU|방송]]에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 가운데 노란머리를 하고 있는 양키풍의 사람이다. "금수저인 주제에 뭘 믿고 나와서 잘난 척 하느냐"는 악플세례를 항상 받는다.]가 저작권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카즈야는 [[키타노 타케시]]의 팬인데, 카즈야가 아직 어렸던 1980년대 초반 히바리는 타케시와 TV에서 함께 공연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히바리는 "내 아들이 널 만나고 싶어해."라며 타케시를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카즈야와 만나게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 형제, 자매들도 모두 배우, 가수로 활동했다. 바로 1살 아래 여동생인 사토 세츠코(佐藤勢津子)는 언니 사후 뒤늦게 50대의 나이에 1993년에 엔카 가수로 데뷔하여 활동하고 있다. 남동생 테츠야도 배우였고,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https://www.youtube.com/watch?v=lNPqKAYdbjE|人生一路(인생일로)]]를 작곡하기도 했다. 막내동생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 본명은 카토 타케히코(加藤武彦).]도 배우로 활동하다 연예계를 은퇴하고 음식점을 경영하였는데, 198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따라서 미소라 히바리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현재 세츠코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남동생 테츠야는 도박, 폭행, 권총소지, 권총밀수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야쿠자]]와 연루되는 등의 사고만 치며 히바리의 골칫거리였다. 그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도 야쿠자와 연루되어 있다"[*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인 다오카 카즈오는 악명높은 야쿠자로, [[야마구치구미]]의 3대 두목이기도 했다. 다만 다오카는 연예기획사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야쿠자성'을 배제하고 소속 연예인들에게 잘해줬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는 의심을 사서 공연이 취소되기도 하는 등, 히바리는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동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동생과 우애가 좋았다. 테츠야는 1983년 4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미소라 히바리의 데뷔 전인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미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여배우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본명은 타카기 후쿠코(결혼 후에는 야마모토 후쿠코), 1923년생이던 그녀는 1943년 20살까지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던 배우였고, 결혼과 동시에 일찍 은퇴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쿠코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당사자였던 미소라 히바리와 심지어 그녀의 소속사인 히바리 프로덕션에서도 타카기 후쿠코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후쿠코에게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히바리 사후인 2010년 도쿄신문에서 타카기 후쿠코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기사에 따르면, 정작 후쿠코는 그저 우연의 일치[* 사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하던 때가 1937년으로,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난 해였으며, 후쿠코가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던 1943년에는 히바리는 겨우 6살이었으니, 당연히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였을 뿐이며, [[대인배|오히려 미소라 히바리를 배려하여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2016년에는 [[가나가와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분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2022년 기점으로 100세를 맞이하게 되신다. * 1999년과 2016년에도 미발표곡이 발견되어서 앨범화 되기도 했으며, 타계 30년이 되는 2019년 9월 NHK 스페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보컬로이드 방식으로 작업해[* 음성 복원은 [[VOCALOID]] 시리즈를 만든 [[야마하]]가 맡았다.] 새로운 곡을 선보였다.[[http://www.thinkofme.kr/wp/archives/3930|#]] 여기서 나온 곡은 2019년 12월 18일 그녀의 곡을 판매해 왔던, 일본 컬럼비아에서 발매되었다. * 2019년 연말 [[일본방송협회|NHK]] 방송에서 그녀의 생전 육성을 [[인공지능|AI]]로 [[딥러닝]]한 그녀의 목소리와 모습을 재현하여 무대에 등장시켰다. [youtube(cM2AJ5JZBd0)]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긴 듯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상 3분 37초부터는 관객들 중에서 아키모토 야스시 선생도 등장한다.] * 2020년 1월, 조카이자 양자인 카토 카즈야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미소라 히바리의 생전 저택 겸 기념관이 매각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일본언론에선 "성지가 사라진다"고 안타까워 하는 중이다.[[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200112-00602050-shincho-ent|#]] [[분류:미소라 히바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